왼손잡이/작은목소리

'운지', '홍어', '슨상님'... 초딩도 쓰는 일베어

민군_ 2013. 5. 31. 09:32
햇살 따뜻한, 잠이 솔솔 쏟아지는 어느 오후였다. 학교 급식소에서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5교시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 수업의 주제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인 '버킷리스트' 만들기. 영화 <버킷리스트>를 보여준 후,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과 함께 '나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양한 버킷리스트들이 나왔다. '마당 있는 넓은 집을 지어서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 '잠수함을 타고 심해 여행을 해 보고 싶다', '북극에서 오로라를 보고 싶다' 등, 저마다 '아이들다운' 소망들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중엔 '성층권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싶다'와 같은 내용도 있었다. 아마도 예전에 화제가 되었던, 펠릭스 바움가르트너씨의 스카이다이빙 영상을 본 모양이다.

마침 시간도 좀 남았길래 그 영상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펠릭스를 태운 캡슐이 열리고, 그가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한 후 이윽고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몇몇 아이들 입에서 "운지~"라는 말이 나온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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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릭스 바움가르트너의 운지(?) 직전 위대한 도전의 순간, 일부 아이들은 '운지'를 외쳤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 Redbull, youtube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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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지? 그거 '번지'인 줄 알았는데요"

순간, 식곤증과 춘곤증으로 인해 몰려오던 잠이 '싹' 사라졌다. 내가 잘못 들었던 것일까?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니, 평소 장난기 가득하던 녀석이 킥킥거리며 웃고 있다. 조용히 그 친구의 책상으로 다가갔는데, 웬걸, 이 녀석의 버킷리스트 활동지는 더 가관이다. 세상에, '운지' 하고 싶댄다.

마침 수업 마침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조용히 그 녀석을 불러다가 물었다.

"너, '일베' 하니?"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내게 반문했다.

"그게 뭐예요?"

"네" 또는 "아니오"라는 대답을 예상했는데, 정확히 예상을 빗나간 대답이 돌아왔다. 게다가 아이의 표정을 봐선 정말로 모르는 눈치길래 다시 물었다.

"네가 아까 수업시간에 '운지'라는 단어를 썼잖아. 그거 무슨 뜻인지 알고 쓴 거야?"
"운지요? 그거 사람 뛰어내릴 때 쓰는 말 아니에요? '번지'랑 같은 거 같은데."

맥이 빠졌다. 이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그러니까 이 친구한테 '운지'라는 단어는 故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번지'랑 비슷한 정도의 느낌을 주는 단어였던 것이다. 아마 얘는 국어사전에도 '운지'란 단어가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날의 사건(?)은, '운지'라는 단어가 어디서 나왔으며,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는 정도로 끝이 났다. 돌아가신 그 분을 좋아했건 싫어했건 간에, 죽음을 그렇게 비꼬고 조롱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하지만 마음 한 켠은 매우 씁쓸했다. 워낙 스펀지같은 아이들이라, 생각없이 무분별하게 잘못된 단어를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을 확인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냥 재미로 쓰는데요?"

생각 외로 '운지'라는 단어는 여기저기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전라도 사람들을 비하하는 의미를 담은 '오오미', '슨상님' 등의 단어들도 그저 간단한 감탄사(?) 정도로 사용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곳은 바로 아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SNS인 '카카오스토리'에서였다. 나와 친구를 맺은 학생들의 스토리를 조금만 훑어 보더라도 이런 단어들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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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운지를 좋아해" 헬기 이름을 지어달랬더니 운지 어쩌고 한다. 위의 친구 닉네임엔 '빨갱이'란 말도 보인다.
ⓒ 김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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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자신의 카카오스토리에 자신이 만든 헬리콥터 그림과 함께, 이름을 지어달라는 글을 올렸다. 이내 친구들의 댓글이 달렸다. 근데 댓글 내용이 가관이다. 어떤 아이는 '빨갱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으며, 어떤 아이는 '난 운지를 좋아해'라 적어 놓았다. 이유는 헬기가 곧 추락할 거 같아서란다. 둘 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길래 불러서 물어보니, 도대체 왜 고작 이런 말을 썼다고 불려왔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냥 사람들이 쓰길래 저도 쓰는 거예요. 재미로."

대구에서 초등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조아무개(30) 교사 또한, "대구타워에서 갓바위 부처님이 떨어지는 그림을 그려놓고 '운지'라는 표현을 썼길래 아이를 혼냈더니, 그냥 재미로 쓴 것이라며 억울해 하더라"라는 이야기를 전해 왔다. 즉, 뜻도 모르면서 그냥 재미로 사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진짜 뜻을 알려줘도 쓰는 아이들, 교육이 필요하다

사실 아이들이 잘 모르고 쓰는 말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아이들이 쓰는 욕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담임했던 아이들이 저학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에 욕을 달고 살길래, 너희들이 버릇처럼 쓰는 손가락욕을 비롯한 각종 비속어들이 엄청나게(!)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 적이 있다. 아주 직설적으로. 그 결과, 단기적으로 아이들의 욕설 사용이 조금 줄긴 했다.

그런데 방학이 지나고 돌아오니, 아이들은 다시 '리셋'되어 있었다.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동안, 아이들을 둘러싼 가정환경, 지역환경, 미디어환경 등으로 인해 그대로 돌아와 버린 모양이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렇게 아이들은 화선지가 먹물을 흡수하듯 너무나 쉽게 나쁜 버릇에 물들곤 말았다.

'일베 언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일단 아이들은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 그냥 주변에서 말하는 대로, 들리는 대로 킥킥거리며 따라할 뿐이다. 뭔지는 몰라도 그런 언어들을 쓰며 킥킥거리는 것이 재미있어 보이니까. 다 큰 어른인 시크릿 멤버 전효성양도 '민주화'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고 썼다는데(이 해명의 진실 여부는 미뤄놓더라도), 어린 아이들 중 '운지', '홍어', '슨상님', '~노?', '앙망' 등 일베 언어의 어원을 제대로 알고 있는 아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래서 더 문제인 것이고, 우리 교사들의 역할도 그만큼 더 커진 것이다. 꼭 일베가 아니더라도, 교육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이런 언어와 문화들은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예의도 없으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당연히 교육이 필요하다. '반(反) 일베' 교육이 아니라, 이것은 당연히 꼭 필요한 인성교육이며, 네티켓 교육이다.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5·18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되신 분들의 사진을 보며 '홍어운운' 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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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어 배달 준비 완료? 최근 논란이 된,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관을 모셔둔 사진을 '홍어 포장'이라 조롱한 일베 게시물.
ⓒ 일간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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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가 없어지더라도 '일베인'은 남는다

좌우지간, 최근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있는 이 '일베' 사이트에 대해, 강제적인 폐쇄를 논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일베충(蟲)', '일밍아웃(일베 유저임을 밝히는 일)'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날 정도다. 직장인 손아무개씨(28)는 "주변 사람들은 다들 일베를 욕한다. 남자친구가 일베 유저임을 알고 헤어진 경우도 봤다"고 전했다. 이렇게 연일 비난을 받고 있는 이 '일베', 과연 사라질까?

내 생각은 '아니오'다. 혹시나 사이트가 폐쇄된다 하더라도, 제2, 제3의 일베가 또 생겨나지 않으리나는 법은 없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매일같이 남들을 비난하고, 사실관계를 왜곡해가며 '산업화'를 외쳤던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현실 세계에서의 지역감정이 사라지고, 사회가 통합되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그래서 더더욱 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아이들이 배려와 존중의 자세를 지닐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어떤 사이트의 정치색에 대해 지도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트가 일베이건 아니건, 상대방 비하와 조롱으로 뒤덮인 그런 자극적인 문화를 아이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일이 없도록 아이들 마음의 힘을 키워주고, 분별력을 길러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베 초등학생' 그리고 '일베 초등교사'

그런 의미에서, 최근 논란이 된 대구 교대 출신의 '일베 초등교사' 논란은 참으로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자기가 맡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에 친히 '로린이(롤리타+어린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놓은 것도 모자라, 각종 성매매 업소 출입 후기까지 무슨 자랑인냥 휘갈겨 놓았으니 말이다. 이런 사람이 초등학교 교사라니, 게다가 나와 같은 지역에 근무하고 있는 교사라니.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다. 이런 교사에게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

알다시피 교직 사회는 좁다. 그래서 이미 무슨 과 몇 학번이고, 이름은 누구고, 사진은 이렇다더라 하는 정보, 어느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다더라 등의 '신상'이 '털린' 상태다. 그렇게 개인정보가 유출되어 비난받고 있는 것은 좀 안타깝긴 한데, 자신이 공직에, 그것도 교사로 있으면서 책임지지 못할 행동을 했다면 거기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본인이 져야 하지 않을까. 이미 몇몇 현직 교사들이 도교육청에 '공직기강 해이 및 품위유지 의무 위반' 등의 이유로 민원을 제기한 상태다.

이 교사가 정말로 평소에 아이들을 생각하고, 열정적으로 교육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자신의 아이들을 '로린이'라 부르며 성희롱을 하는 모습을 보자하니, 이 교사는 아이들이 일베언어 쓴다고 뭐라 하기 전에 스스로 반성 좀 많이 해야 할 듯싶다. 아무튼 고맙다. 당신 덕분에 많은 선생님들이 당신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으니.